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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과 육아 사이에서 무너지게 되는 순간들

by cherish-you 2026. 3. 29.

1. 아무 일도 아닌 하루였는데,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그날은 정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하고, 급하게 아이를 깨우고, 밥을 챙기고, 옷을 입히고, 가방을 확인하고,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출근길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렇듯 사람들 사이에 섞여 움직였고, 회사에 도착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처리했다.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덜 바빴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종일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무언가 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몸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마음이 먼저 지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냥 계속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보통은 퇴근이 기다려지는데, 그날은 집에 가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단순했다. 집에 가면 또 해야 할 일들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돌봐야 하고,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정리를 해야 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쉬는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집 문을 열자마자 아이가 달려와 안겼다. “엄마!”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는 평소에는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웃어줘야 하는데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고, 아이의 말을 듣고 있는데도 머릿속이 멍한 느낌이었다. 아이의 이야기가 귀에는 들어오는데 마음까지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지쳐 있었다. 그게 그날의 가장 정확한 상태였다.

2, 결국 사소한 순간 하나에서 무너졌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아이는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한 행동을 보여주고, 계속 말을 걸었다. 평소 같으면 그게 귀엽고, 그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그 모든 말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대답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엄마 이거 봐”
“엄마 나 이거 했어”
“엄마 근데…”

아이의 말은 계속 이어졌고, 나는 계속 짧게 반응했다. 듣고는 있지만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해야 할 일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물컵을 건드리면서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닦으면 되는 일이었고, 평소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게 다르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올라왔고,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나왔다.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말을 하고 나서 바로 알았다.
이건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인 내 감정이 터진 말이라는 걸.

아이의 얼굴이 순간 멈췄다. 눈이 커지고, 입이 굳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미 나온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아이도 울기 시작했고, 그 상황은 더 어색해졌다. 나는 더 말을 하지 못했고, 아이는 눈치를 보면서 조용해졌다. 집 안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때 느꼈다. 아, 내가 지금 무너졌구나. 그날의 문제는 그 물컵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계속 쌓여 있던 것들이, 그 순간 하나로 터져버린 것이었다.

 

3. 조용해진 뒤에 더 크게 밀려오는 마음

아이를 재우고 나서 혼자 남았다. 집은 조용해졌고, 해야 할 일도 어느 정도 끝났다. 그런데 마음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아까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의 표정, 내가 했던 말, 그 순간의 공기. 하나하나가 반복되면서 더 선명해졌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었을까. 생각할수록 답은 명확했다. 아니었다.
그건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넘기지 못했다. 그때부터는 나를 향한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왜 이 정도도 못 참을까. 나는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이 질문은 끝이 없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 그동안 계속 쌓여왔던 것들, 충분히 쉬지 못했던 날들, 작게 쌓여 있던 피로와 감정들이 오늘 그냥 한 번에 나온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내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꽤 오래 버티고 있었던 상태였다는 것. 그날 이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한 가지는 조금 달라졌다. 무너졌던 날을 떠올릴 때, 예전처럼 나를 몰아붙이지는 않게 됐다. 그날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일부러 멈춘다. 다 못 해도 그냥 둔다. 조금 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결국 또 같은 날이 올 것 같아서. 그날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잠깐 내려놓은 것이었고, 그게 필요했던 날이었다는 것을.